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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
관측과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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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마르티네스 & 지나 콜

지나 콜 - 망령

그 사람들은 서쪽 땅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그 사람들은 서쪽 땅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손에 짐을 든 채였다. 나는 두 사람 중 아가씨로 보이는 사람이 입은 모슬린 드레스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자 이모가 내 팔을 잡아끌었던 게 기억난다. '가까이 하지 말라.'는 신호. 그들은 조금 이상했다. 아가씨의 드레스는 흙으로 더러워졌고 땅에 질질 끌렸다. 아가씨 옆에 있는 노인은 절뚝거리면서 걸었는데, 어린아이의 옷을 뺏어 입은 건지 짧은 옷 밑으로 발목과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이모에게 귓속말을 하자, 이모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는 듯 채근했다. "궁금해할 것 없어."

  그들은 마을에 정착했다. 아가씨의 이름은 지나. 지나는 값비싼 옷과 장신구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가 '부잣집 아가씨'고 노인이 그의 집사라고 떠들곤 했지만, 소문에는 늘 의혹이 따라 붙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 지나의 태도에는 우아함이 없다. 뭐가 됐든 아가씨 답지 않다. 지나가 작은 목공방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은 지나를 '아가씨'로 대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아가씨와 목공은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어느 저택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 온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쪽에 콜 가문 소유였던 대저택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그들이 이 마을에 도착한 시기와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지나가 첫날 입었던 모슬린 드레스를 기억했고, 내심 지나가 콜 가의 사라진 딸 같은 게 아닐까 망상하곤 했다. 망상이 망상으로만 끝난 것은 내게 지나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지나를 암암리에 피했고, 이모는 노골적으로 지나를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눈 밖에 나기 싫어서 지나를 피했다.

  그러나 1년 뒤, 나는 지나의 목공방에 앉아 있다.

  "그럼 며칠 뒤에 찾아오면 될까요?"

  "글쎄요…. 우선 이걸 써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한번 찾아갈게요."

  "집으로요?"

  "아… 사용하실 분을 직접 만나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모께서 거동이 불편하신 거죠…?"

  그랬다. 나는 이모 때문에 이곳에 왔다. 얼마 전에 이모가 계단에서 크게 구르면서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동네에 목공방은 한 군데가 더 있었지만, 지팡이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았다. 나는 지나와 함께 사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고, 이모에게는 말하지 않고 지나를 찾았다. 지팡이를 만들어 줄 수 없느냐는 말에 지나는 왜인지 난감해했지만, 결국은 받아들였다. 지나는 이모의 키, 덩치, 집안의 구조나 자주 다니는 길을 세심하게 물어보고 지팡이를 하나 건네줬다. 하지만 집에 오는 건 다른 문제다. 상상과 무관하게 지나는 사람이었고-당연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차마 '이모라면 이곳에 죽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어… 이모가 그게… 갑자기 아프면서 많이 상심하셨어요. 그래서 손님도 잘…."

  형편없는 변명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럼…."

  지나는 대안을 제시했다. 번거롭더라도 내가 이모의 요구를 지나에게 전달하는 식이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지나가 손해를 볼 텐데.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이걸로 계산할게요."

  "그건 안 되는데요."

  안 된다는 말을 못할 것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당황했다. 지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옆에 놓인 지팡이 끝을 천천히 매만졌다.

  "무게를 지탱하는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쓰실 거니까요… 그 분한테 맞아야 해요."

  거절하면 더 곤란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나.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정갈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네, 이반."

  지나가 답했다. 나는 노인의 이름을 그제야 기억해냈다. 이반이 문을 열고 나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 들고 해요."

  "아… 고마워요. 곧 갈게요."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나는 일정하게 바닥을 울리는 지팡이 소리를 들었다. 그들 사이에는 확실히 '할아버지와 조카' 같은 사이로 단정 짓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었다.

  "저 분 것도 지나가 만든 거죠?"

  "…네. 일단은요."

  어딘지 불만족스러운 목소리였다. 나서기 전에 나는 지나의 목공방을 둘러보았다. 왠지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나의 목공방에 자주 들렀다. 이모의 자잘한 불평을 옮기면서 지나의 일거리를 늘리는 데 대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나는 반복되는 일과 늘어나는 이모의 짜증 때문에 지친 상태였고, 조용한 지나의 목공방은 내게 숨 쉴 틈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지나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지나는 주로 조용히 듣기만 했지만, 가끔 내가 재밌는 말을 하면 웃기도 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이반의 얼굴도 익숙해졌다. 이반은 가벼운 미소를 띤 얼굴로 내게 인사한다. 그러면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의 일상을 공유하면 공유할수록 지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나의 과거를 종종 물었다. 지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곤란하면 입을 다물곤 했다. 알 수 없는 대답도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부모를 묻는 말에 "이제는 없어요."라고 대답하고, 실수했나 싶어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런 게 아니에요."하고 도리어 난감해하지 않나…. 더 물어도 나오는 건 없었다. 하루는 지나와 이반의 관계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지나는 이반이 한때 집사였으며 이제는 친구인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지나는 역시 부잣집 아가씨였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기 어려워했다. 그때 이반이 문을 두드렸다. 평소보다 살짝 이른 시간이었다. 마치 우리가 무슨 얘길 나누고 있었는지 아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나는 이반의 미소에 께름칙한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지나도 이반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둘의 사이에 대한 호기심에 더불어 의혹이 생겼다.

  "당신은 이반과 닮았군요…."

  그래서 지나가 이렇게 말했던 날은 참지 못했다.

  "내가요? 어디가요?"

  "이반이 늘 그렇게 물어봤거든요. 이것저것…."

  "아니 그건…."

  나는 이반에 대한 비합리적인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그거야말로 수상해요!'하고 외칠 뻔했다. 그러면 나 역시 수상한 놈이 되어버리는 꼴이다.

  "지나가 궁금해서 그래요."

  "…내가요?"

  "당연하잖아요. 궁금하지 않으면 질문 안 하죠!"

  지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입술을 떼었다 말았다 반복했는데, 나는 슬슬 지나가 말할 때 오래 걸리는 타입이라는 걸 깨닫고 있던 참이라 이번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나는… 말하는 게 서툴러요. 뭘 숨기려고 하는 건 아닌데요."

  "…알아요."

  "글로 쓰는 건 조금 익숙해졌는데… 아직 말은 어렵군요."

  "글을 써요?"

  그건 의외였다. 지나가 펜을 붙잡고 종이와 씨름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지나가 하루종일 나무만 만지고 있을 줄로 알았다. 지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랍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늘 가지고 다녀요." 나는 한 손을 내밀었다. "구경해도 돼요?" 지나는 잠시 망설이다 수첩을 내게 건넸다.

  수첩 귀퉁이에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지나 콜'

  순간 내 오래된 망상이 빛을 발하며 퍼즐이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재혼하여 살림을 차린 콜 부인. 폭삭 무너진 대저택. 사라진 딸.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서쪽 땅에서 나타난 아가씨. 집사.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지나에게 나의 망상, 지나를 처음 봤던 날, 이모의 멸시, 죄책감, 호기심과 의혹을 마구잡이로 뒤섞어 내뱉었다.

  "당신이 말해줘요, 지나."

  그리고 지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아니… 사라졌다고 하는 게 옳을까요? 나는 아직도 그때를 잘 설명하지 못하겠어요… 이반이라면 알지도 모를 텐데요. 이반은 내게 많은 걸 줬습니다. 이 수첩도 그렇죠.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어렵군요. 나에 대해 말하는 것…… 아는 것이요.

  그때는요.

  그때는 그랬어요… ….

 

 

 

내 이름은 지나 콜입니다.

마르티네스 씨가 내 이야기를 써 보라고 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렵군요.

 

 

 

  이반이 지나의 방을 뒤지고 있었다. 막 방에 들어오던 지나는 열린 서랍과 등을 굽힌 이반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뭘… 하고 계세요?"

  이반은 어깨를 편다.

  "목걸이를 찾았어요."

  상황에 순응하는 듯한 매끄러운 어조였다. 그는 어질러진 주변을 정리할 생각도 없는지, 자연스럽게 등을 돌려 지나에게로 다가왔다.

  "필요 없으신 것 같길래 제자리에 두려고 했는데, 목에 걸어 드릴까요."

  이반은 지나가 며칠 전 잃어버린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지나는 원체 둔한 사람이었지만, 자신과 이 집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건 알았다. 그게 이번엔 이반 마르티네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 있는 것들… 전부 필요없어요…."

  말을 흐리면서 고개를 들자, 이반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는 꼭 시험에 틀린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반은 시야 밖으로 사라지더니, 지나의 등 뒤로 걸어왔다.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감촉. 이건 지나의 할머니가 어머니에게로, 다시 어머니가 지나에게로 물려준 목걸이다.

  며칠 전 지나는 장신구함에서 작은 별 모양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매일 아침 목에 걸던 것이었다. 장신구함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만은 잊을 수 없었다. 이반도 그걸 알았다.

  "아가씨, 왜 목걸이가 중요하지 않나요?"

  지나는 목걸이가 제 목에서 반짝이는 걸 내려다 보며, 이 목이 허전할 때도 괜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목걸이를 두르고 있는데도 목덜미가 허전했다. 아니, 목걸이가 외려 서늘한 감각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 엄마가 제 목에 목걸이를 걸어줬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지나의 앞으로 돌아온 이반이 지나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처음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건… …."

  지나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흘리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으나 이반의 질문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같은 눈높이에 서서 늘 똑바로 묻고 바르게 답했다. 지나는 망설이다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무엇이라도 이반이 답을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역시 이런 건 한심한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진정으로 한심한 건…"

  하지만 이번에 이반은 말을 흐렸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더니 말을 끝맺지 않은 채로 지나의 방을 떠났다. 지나는 혼란 속에 홀로 남겨졌다.

 

 

 

 

엄마는 목걸이가 할머니의 유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하지만 엄마는 매일 목걸이를 찼습니다. 제게 목걸이를 주기 전까지는요. 엄마는 목걸이를 제게 줬고, 이제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집에는 마르티네스 씨만 남았습니다.

모두 왜 떠났을까요. 그는 왜 떠나지 않았을까요.

 

 

 

 

  목걸이를 찾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이반은 지나에게 수첩을 하나 건넸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세요. 서랍 안에 있는 것들은 여전히 필요없다고 생각해도 괜찮지만, 언젠가 이 수첩만큼은 당신에게 중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주인님.

  지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수첩을 폈다. 밑으로 늘어진 목걸이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흔들거렸다. 지나는 흰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이 이반의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사용인들은 지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들이 이 집에 있었을 때는 그랬다. '주인님'은 엄마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 집에 남은 건 이제 단 둘뿐이었다. 목덜미가 시큰했다.

  지나는 이반과 종종 대화를 나눴다. 주로 이반이 물으면 지나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지나는 결코 사교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반과의 대화가 무척 생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이 긴 시간을 들여 참을성 있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탐구하듯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다는 것 따위를 깨닫지 못했다. 답하기 어려운 건 글로 써보세요. 이반이 말했으므로 지나는 수첩에 일기를 적었다.

  말도, 글도 지나에게 친숙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는 나무를 만졌다. 처음에는 작은 장난감이나 도구 같은 걸 만들다가 조금 더 커서는 가구로 영역을 넓혔다. "의자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어." 엄마가 매번 저주하던 의자를 바꿔주고 싶었던 게 시작이었다. 지나는 평생을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엄마에게 저주받은 의자나 흠이 생긴 서랍, 부러진 받침대 같은 것들을 대체할 것을 만들었다. 완성되기 전까지 그것들은 지나를 비난하거나 몰아붙이지 않았다. 슬프게 만들지도 않았다. 잘못되면 고치고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알맞은 자리에 물건을 돌려놓고 나면 희미한 충족감이 가슴에 들어찼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지난 일이다. 지나는 무얼 만들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집이 흠결 없이 완벽한 것이 아닌데도 나무를 만지고 두드리고 깎아낼 욕구가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제 필요없었다.

  집이 비어버렸으므로.

  꿈에서 지나는 나무를 만지고 두드리고 깎았다. 나무는 깎이고 뭉툭해지고 매끄러워졌다가 거친 결을 드러냈으나 그뿐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모양도 이루지 못했다. '조금만 더'. 지나는 답답함에 공구로 나무를 세게 내리쳤다. 나무가 예상과 다른 모양으로 깎이면서 손이 중심을 잃는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지나의 손가락을 뚫고 튀어나온다. 등골이 오싹했다. 피가 흐른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풍경에 지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대는 조용히 지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긴 얼굴. 작은 빛이 그 얼굴 위에서 일렁거렸다. 지나는 눈을 크게 뜨고 뻣뻣한 손을 겨우 움직여 목을 더듬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닿았다.

  "주인님."

  상대가 입을 열었다.

  "…이반."

  "네. 마르티네스입니다. 물을 가져다 드리죠."

  이반은 들고 있던 촛대를 기울여 지나의 방에 불을 밝혔다. 이반이 멀어지자 지나는 식은땀을 닦고 자리에 앉았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동안 의혹이 마음을 불안하게 떠밀었다.

 

 

 

 

 

 

  "그 사람 대체 뭐예요?"

  나는 이야기를 끊고 불쑥 물었다. 지나 역시 이반을 께름칙하게 생각했다는 걸 눈치챘다. 들으면 들을수록 수상했다. "아니, 물건을 훔쳤으면… …." 이반의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지나, 들어가도 될까요."

  "네, 이반."

  곧 이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일어나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나는 온갖 의문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돈을 노리고 붙은 자가 아닐까? 지나를 왜 보고 있었을까? 왜 그런 질문들을 했지?

  밤이 깊은 뒤에야 내가 그날 지나에게 보였던 태도가 후회됐다. 거울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하다 문득 지나의 이야기 속에서 지나와 이반의 눈높이가 비슷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지나는 이반과 나보다 키가 한참 작았다. 무릎을 굽혀줬다는 뜻일까?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내가 그들의 사생활에 너무 몰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망했다.

  지나의 목공방이 이틀 동안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초조함을 안고 지나의 얼굴을 기다렸다. 3일째 되는 날 다행히도 목공방이 문을 열었다. 지나는 이반과 함께 볼일이 있어 잠시 문을 닫아야 했다고 말했다. 며칠 전 내가 보인 행패는 완전히 잊은 듯한 태도였지만 나는 지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기왕이면 이반에게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요. 지금 계시나요?"

  "아… 내일은 있을 거예요."

  "그럼 내일도 다시 올게요."

  "음. 네. 저, 그리고…."

  지나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서 나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역시 날 용서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조만간 떠날 것 같아요."

  "네?"

  "지팡이를 다 만들었어요. 부족할지도 모르는데요. 여기요."

  지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나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지팡이를 받았다.

  "아주 떠난다는 건가요? 저기, 벌써요?"

  "네… 아쉽게 됐네요."

  지나가 정말로 아쉬운 표정이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소식에도 마음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앉아서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내 실수가 발목을 잡고 우리의 거리를 다시 벌린 것 같았다.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몇 번이나 한 뒤에야 잔금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반의 노크도 없이 희한하게 적막한 날이었다. 나는 문가까지 배웅을 나온 지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요?"

  "잘 모르겠어요."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다.

  이모는 지나가 공들인 지팡이를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했고, 나는 이반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지나와 이반은 처음 왔을 때처럼 갑자기 떠났다. 나는 그들이 떠나고 빈 집에서 이반이 매일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식탁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그걸 모르고 놓고 갔을 리는 없었다. 나는 그들이 그 지팡이를 남기고 떠났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챙겼다. 모슬린 드레스에 마음을 빼앗겼던 인연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지팡이로 끝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묘하다. 나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따뜻한 기척에 지나는 눈을 떴다. 이반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이반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에 들었던 게 기억났다. 지나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막 맞은편에 앉은 이반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지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지팡이를 눈으로 찾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다듬었던 나무. 그것도 1년 정도가 지나자 이제 손잡이가 반질반질해졌다. 그러나 길이는 이반에게 조금 짧고, 끝이 살짝 갈라졌으며, 균형이 왼쪽으로 쏠렸다.

  "잠시만요…."

  지나는 담요를 옆에 두고 목공방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손에 새 지팡이를 쥔 채였다. 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오래 걸렸네요."

  이반은 지나가 자신에게 내민 것을 한참 바라보다 제 손으로 가져왔다. 처음 땅을 다시 짚는 것처럼 생경한 감각이었다. 꼭 지나와 함께 그 집을 나왔던 날처럼. 그날 이반은 살았고, 무너졌으며, 다시 일어났다. 지나가 그를 부축했다. 지나는 어디로 가야 할 지 길을 알 수 없었으나 이반을 부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함께 쉴 곳을 찾았고, 지나는 이반을 위한 지팡이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1년. 마침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이반은 지나가 새로 만들어 준 지팡이의 손잡이를 만지며 지나를 바라보았다.

  "제게 잘 맞습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지나가 말을 흐렸다. 이반은 침묵을 깨지 않고 한참 기다리다, 지나가 말을 끝맺지 않을 거라는 게 확실해졌을 때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이반."

  "네, 지나."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나요?"

  그들이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한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지나는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반은 그들에게 새로운 행선지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는 걸 직감한다.

  "외로움을 없애려고 노력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찾아 헤맸죠."

  "그걸 찾았나요?"

  이반은 고개를 젓는다.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주인님을 모시고 나왔으면서도요…. 이상하죠?"

  차분한 대답에 지나의 불안이 차츰 얼굴 뒤로 가라앉았다. 내용을 뜯어보면 해답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나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같이 찾아요."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옛날처럼 눈높이가 조금은 비슷해졌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이반은 순순히 수긍했다.

  "네. 같이 찾으면 되겠군요."

이반 마르티네스 - 방화

양지바른 곳으로

 

1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나요?”

  “외로움을 없애려고 노력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찾아 헤맸죠.”

  “그걸 찾았나요?”

  지나는 지팡이를 갈아주며 이반에게 물었다. 이반은 손에 들린 지팡이를 부드럽게 쥐고 지나에게 집중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가지 마세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야, 이반. 넌 여기서 잠시 우리를 기다리는 거야.” 이반은 방 밖에서 부모가 천운으로 은인이 나타났다거나, 아이를 두고 자신은 어느 곳으로 가겠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던 것을 들었다고 덧붙이는 대신 조용히 말했다. “언제까지요?” 여자의 얼굴에 안도가 내려앉는다. 알게 모르게 이반의 심장도 주저앉았다. “네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도 그러고 싶거든.”

  지나가 태어나기도 전 응접실, 이반은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지도, 사용인이 내어준 과자를 집어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적당히 맞장구치듯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제 고모가 이곳을 추천해주었으며, 그 귀인은 집주인의 친척이라는 말을 하녀장과 나누며 고개를 숙였다. 하녀장은 선뜻 이반을 바라보더니 무던한 태도로 받았다. 차를 가져다준 문 뒤의 사용인들은 대체로 조용했지만 어른스러운 아이의 행동에는 감탄했다. 작고 마른 손으로 뭘 할 수 있느냐는 농담도 섞여 있었다. 이반이 흘깃 시선을 들자 그들은 흩어졌다. 이반은 두 손을 깍지 껴 내렸다. 부모의 일을 수습하기에는 걸리적거리는 자신을 맡아준 이곳에 깊이 감사를 표해야 했다. 평생 다해 갚아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는 그렇게 지금까지, 심지어는 그 아이의 딸에게도.

  이반은 찰나의 상념을 떨쳐냈다.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주인님을 모시고 나왔으면서도요…. 이상하죠?”

  전과 달리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지나의 지팡이가 되고 싶었다.

 



2

  예금이 대거 사라졌다. 은행원은 범인을 은행장 마르티네스로 지목했다. 마르티네스는 인망이 두터운 만큼 정치에 무감했고, 추락하기 쉬웠다. 마르티네스 부부는 무고를 증명해줄 증인을 찾고 직접 도둑을 쫓기로 했다. 그들의 긴 여정에 이반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반은 콜 가문의 사용인 중 가장 어렸다. 게다가 먹고 잘 곳이 없어 값싸게 자신을 내다 판 하인들과는 다른 경로로 들어왔기에, 하인들은 이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았다. 이반은 집안 사정을 감추기 위해 그들 사이에 섞이려고 애썼고─청소와 빨래를 해본 적 없는 풋내기는 맞았다─, 주인님의 일정을 묻고, 콜 가문 사람들의 사정은 귀동냥으로 주워들었다. 세 달이 지나자 이반은 편의를 누리는 얼간이에서 그냥 싹싹한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낸 제 일은 콜 아가씨를 보필하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이반보다 한 뼘 작은 키로 온갖 창고를 들쑤시고 다녔다. 이반이 들어오고 이반의 부모가 떠날 즈음에는 웬만한 하녀들이 두 손 두 발을 들고 포기했었다. 이반은 한창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사용인들이 포기한 일은 아가씨가 유일했다. 그는 콜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시종은 못 되었지만, 운은 따랐다. 이반은 빨래를 다 널고 들어오는 길에 벽난로를 쇠꼬챙이로 들쑤시는 콜 아가씨를 마주쳤다.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이반은 양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칼만 보고도 눈치챘다.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네. 그렇지만 오래 쥐고 계시면 데일 거예요.”

이반은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콜은 갈등하는 눈치였다가, 금세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는 알아.” “그렇다면 들어 드릴게요. 원할 때 돌려 드리고요. 그리고 지금 본 건 비밀로 하겠습니다.” “영원히?”  “원하신다면요.”

  콜은 의심하면서도 순순히 쇠막대를 건넸다. 막대는 중간까지 어느덧 달구어져 홧홧할 만도 했다. 그래도 이반은 덜 아팠다. 콜은 이제 가보라는 듯 건성으로 손을 휘적이다 문득 유심히 이반을 뜯어보았다 “가만, 너 같은 애가 있었나?”

  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온지 얼마 안 됐어요. 지금은 한창 일을 배우고 있고요. 이반 마르티네스라고 합니다.”

 “흐음.”

  콜의 눈이 가늘어졌을 때, 이반은 돌아가지 않고 물었다. “왜 쥐를 태우고 계셨어요?”

  “언제 봤지?” 콜은 머뭇거리다가 피곤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오늘따라 그러고 싶었어.”

  “그런 기분이란 어떤 건데요?”

  콜의 따가운 시선은 금세 비꼬는 듯한 말투로 번졌다. 자세를 틀며 그는 말했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기분을 설명해봤자 이해할 수나 있을까?”

  이반은 눈을 깜빡였다. “이해해요. 어떤 식으로든 잘못된 마음은 없어요.”

  “…의자 갉아먹는 걸 봐줬는데, 내가 준 밥을 잘 안 먹었거든.”

  “네, 그래서 아가씨는 나아지셨나요. 괜찮으세요?”

  콜은 이반을 노려보았다. 이반은 콜을 타이르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 진솔하게 묻는 것처럼, 괜찮아졌다고 말한다면 동조해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이반은 누군가에게 등 떠밀리듯, 지금 물어보지 않는다면 콜 아가씨에게 영원히 다가설 수 없을 것 같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건…”

  이반은 콜이 어떤 대답을 들려주었는지 기억한다. 그는 다음부터 우연히 이반을 마주치면 무엇을 하는지 지나가듯 묻곤 했다. 어느새 이반은 콜의 공범이 되었다. 그날 하녀장이 쥐 사체를 태운 범인을 색출할 때 화상을 입은 손을 내밀며 자원했다. 사용인들의 숙소 문 위에 걸레를 빤 물양동이를 매단 다음 도망치도록 도왔고, 콜이 상냥해질 때에는 모른 척 피하다가 가끔 마을로 내려가 몰래 콜이 필요하다는 물건을 사다 주었다. 콜은 이반에게 가끔 어려운 과제를 요했다. 목표가 그의 신분으로는 살 수 없는 진주 귀걸이에 다다를 즈음 이반은 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콜의 서랍에는 이미 값비싼 장신구가 널려 있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쥘 수 있었는데도, 콜은 이반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시험하려고 들었다. 이반은 늘 주인의 방을 청소하는 척 세 번째 서랍에 물건을 놓고 떠났으며, 콜은 같은 자리에 보상을 두었기 때문에 일련의 행위는 비밀스러웠다.

  진주 귀걸이를 서랍에 넣던 이반은 금장식이 들어간 편지칼 아래 조만간 버려질 봉투 겉면에 ‘다음에는 직접 달아 드리겠습니다.’ 라고도 썼다. 이반은 변덕스러운 아가씨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잘 알았다. 그리고 콜이 이 저택에 있는 이상 자신이 또다시 버려질 일은 없겠다는 고양감을 느꼈다. 콜이 이반의 키를 넘고 나서도 마르티네스 부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3

 

  아가씨의 그림자가 되는 동안 이반은 가벼운 이별을 몇 차례 경험했다. 이반을 지켜보거나 거들던 사용인들은 조모의 건강 때문에, 출산과 결혼 때문에, 겨울에 고열을 앓다 죽어서, 그 외 가물한 이유로도 이직했다. 이반은 늘 가장 먼 곳에서 짐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이반의 가족처럼 당연하게 목적지가 있는 것 같았다. 이반은 그들처럼 단촐한 짐을 챙겨 언덕을 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배웅하는 상상을 덧그렸다. 그들이 그립지는 않았다.

  콜 부인도 저택을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반은 콜의 딸보다 일찍 직감했다. 지나는 어머니보다 하인과 말을 오래 나누는 걸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허전한 환경에서 자랐다. 누가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사라진다면 당황할 아이. 콜이 그를 낳고 집을 자주 비우자, 이반은 앞으로 콜이 자신에게 숙제를 낼 일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늘 그렇듯 제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이반은 장부 계산을 가장 잘 하는 소년이 되었고, 남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집사가 되었다.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동안 이반은 아침저녁마다 딸아이의 옷을 갈아입혀주었다. 지나는 콜처럼 조용히 팔을 벌린 채 거울 안을 들여다보았고, 이반은 모슬린 드레스의 옷고름을 정돈해주는 것을 연례행사로 여겼다. 이반은 지나의 공구를 주워주며 지나는 이반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선까지 컸다.

  이반은 지나의 새 구두를 맞추려고 장인을 불렀다. 단골의 구두 장인은 작고 구부정해도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머리를 턱선에서 반듯하게 자른 여자였다. 이반이 알던 것과 다르게 그날은 그의 딸이 동행했다. 한창 늙은 장인의 머릿결은 굽실굽실해졌다.

  “어머니께서 슬슬 거동이 불편해지셔서, 앞으로는 제가 물려받을 것 같아요.”

  “아직 한참 남았어. 그런 소리 안 해도 된다.”

  “그러고 보면, 꽤 오래 찾아주셨죠. 예전에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르티네스 씨는 여전하시고요. 처음 왔을 때에는 작았던 것 같은데… 아, 엄마. 꼬집지 마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알겠다니까요! 마르티네스 씨, 새 구두는 필요 없죠?”

  “원체 깨끗하게 신어서 괜찮습니다. 뒤축도 멀쩡해요.”

  그는 이십 년 전부터 셔츠도 가죽 구두도 새로 고를 필요가 없었다. 재봉사의 대가 바뀌고 나서도. 사람들은 엎어지고 뒤바뀌며 움직이는데 이반의 발은 커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조금도 늙지 않았다. 모녀는 쾌활하게 몇 가지 유의점을 묻고 돌아갔지만, 이반은 영 일이 끊나지 않은 기분이었다. 부모님과 콜을 기다리고, 제자리를 찾으면 나아질 거라는 바람 이상으로 유쾌하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이 일을 몇 남지 않은 동료 중 하나에게 털어놓았더니 계속 음식을 깨작거려서 그렇다든가, “마르티네스, 넌 늘 그대로구나.” 하고 웃어넘기기만 했다. 왜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그는 점차 늙고 닳아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진실을 보지 못해 미쳤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은 이곳에서 이름을 지울 수 없는지도 고민했다. 지나가 새 구두를 신으며 잘 맞는다고 말하고 나서도, 그의 주인과 둘이 될 때까지도 답은 찾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주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외출을 나섰다. 콜이 가끔 가리키며 “직접 뛰어 넘어가보고 싶어.” 라고 말했던 담장 아래의 구멍으로 달아난 것이다. 이반은 그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던 이유가 자신이 변하지 않은 탓일 거라며, 가장 큰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질 지나에게 목공용 나무를 구해다 주는 상인에게 물을 것이 있다며 둘러댔다. 지나는 한참 조용히 입을 달싹이다가 별말 없이 끄덕였다. 가진 것은 없었고, 짐은 남김없이 챙겼는데도 이상하게 남겨진 지나의 얼굴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정문이 아닌 숲으로 떠난 건 그 건너편에 해답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이반은 처음 수풀을 밟고 나서 자유를 쟁취했다고 생각했다. 아예 영영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높게 선 나무들이 무성하게 일탈을 숨겨주었다. 구름이 껴 바닥에서부터 습기가 올라오자, 이반은 오늘 나무를 구하러 갈 수 없는 날씨라는 걸 짐작했다. 지나는 이반의 거짓말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반은 다시 나이테를 보고 길을 찾는 법을 상기했다. 몇 시간을 걸어 숲을 넘어가면 도심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고, 이반이 잠깐 묵었던 여관을 찾아 연줄을 대볼 계획이었다.

  이반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강을 건너고, 사과를 씹으며 나무껍질에 칼을 그어 표식을 남겼다. 아버지는 아예 나를 잊었을까? 어머니는 계속 글을 쓰고 계실까?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해가 질 즈음에도 이반은 건물 하나 보기는커녕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반이 기시감을 느끼고 제자리에 멈춰선다.

  땅에서 솟아난 무언가 이반의 발목을 단숨에 잡아채 당겼다. 순간 솟아난 아픔은 다리가 아닌 심장을 옥죄었다. 나는 지금까지 실패해본 적 없는데, 지금은 누군가 내가 잘못되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왼발이 중심을 잃어 강하게 이마를 찧었다. 족쇄는 소름끼칠 만큼 축축하게 종아리를 타고 기어오른다. 피가 흘러도 아프지 않은데 살의는 명백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이반은 아무 잡초나 움켜쥐고 허둥거렸다. 주인을 섬기지 못한 벌이라면 진작에 내려주시지. 이미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떠나버렸는데. 시야가 핑핑 돌아 몸을 웅크리고, 다리 근처에 팔을 휘두르며 이반은 부디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길 간곡히 하늘에 빌었다.

  이반은 신의 존재를 믿고 가르침을 새길 뿐, 길은 스스로 내는 거라 곧게 믿었다. 그간 저지른 업은 죽은 뒤에나 심판받는다고 생각했다. 신은 자신이 성실하기만 했던 시절에도 보답해주지 않았고, 귀걸이를 훔쳐도 방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필연을 거스를 힘이 필요했다. 이반의 기도를 들어준 것처럼 밧줄은 끊어졌다. 인대가 늘어나고 발목뼈가 나간 것만 같았다. 더듬거리며 퉁퉁 부어오르는 복사뼈를 매만질 즈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반?”

  엉망이 된 이반의 위로 지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나절을 걸어 도착한 숲의 초입에서 모든 긴장이 목울대를 내리치고, 동시에 덜컥 내려앉는다. 이반은 창백하게 질린 채 바닥을 짚고 중얼거렸다. “콜.”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투명했다.

  “…다쳤어요?”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오다가 길을 헤맸어요.” 이반은 재빨리 머리를 헝클어뜨려 쓸린 자국을 가렸다. 게다가 욱씬거리는 통각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반은 지나가 자신을 문책한다면 어떻게 변명할지 여러 대안을 골라냈다. 지나는 한참 눈치를 보면서도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상처가 깊은데요.”

  “괜찮아요. 보시겠어요?”

  지나가 걱정스레 가리킨 바짓단을 들추면, 어느새 상처는 씻은 듯이 옅었다. 벌어진 피부가 오물거리며 닫히는 것이 얼핏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나는 놀란 채 말끝을 늘어뜨렸다.

  “그렇네요.”

  이반은 몸을 일으키며 나뭇잎을 털어내고, 짐을 들고 정중히 미소지었다. 콜 부인은 더이상 없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는 지나 콜이었다.

  “그대로 계시면 드레스 밑단이 젖어요. 들어갑시다. 음, 대신 저녁은 가볍게 먹을까요.”




4

 

  다친 발목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고, 몇 시간 덜렁거리다가도 자고 나니 감쪽같이 아물었다. 이반은 자신의 세월이 묶였다는 걸 깨달았다. 발을 휘감은 붉은 자국은 꿈에서만 본 게 아니었다. 이반은 숲을 떠날 수 없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상흔의 원인은 날카롭게 살을 할퀸 만큼 굵고 단단한 나무 뿌리 같기도, 나무 껍질 치고는 무늬가 촘촘한 뱀의 몸통 같기도 했다.

  주인은 한때 이반을 이 집에 머무를 수 있게 하는 구실이었다. 이제는 지나도, 콜에게도 자신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잘 안다. 지나가 홀로 남겨진다 해도 달라질 것 없다. 지나는 계속 나무를 깎고, 풀을 바르고 못질을 하며 제자리에서 지낼 것이다. 목걸이를 걸어줄 사람이 없어도 지나는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밀물이 천천히 들어오듯 지나는 저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불순물은 자신 같았다.

  그런데도 이반은 집에서 떠날 수 없다. 기다리는 사람도 돌아오지 않을 텐데. 이반은 지나가 자신에게 의지할수록 빈 자리를 잘 찾아갔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떨쳐내고 싶었다. 그는 여전히 달력을 계산하며 지나가 앞으로 더 살 날을 세어보았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길 것이다. 이반은 달력을 치우고 서재에 들어갔다. 이미 지나의 점심식사는 가져다 주었고, 그는 다시 작업에 골몰할 터였다. 이반은 손을 뻗어 책등을 죽 쓸었다. 장르와 작가, 제목으로 책에 보이지 않는 라벨을 매기거나 책장에 먼지가 내려앉지 않도록 쓸고 닦으면 그나마 잡념이 달아났다. 이반은 나란히 꽂힌 전집 중 불룩하게 튀어나온 책을 빼냈다. 그 뒤에 못 보던 검은 표지의 책이 끼어 있었다. 건실한 책이라기에는 낱장을 엮은 매듭 처리가 조잡했다. 이반은 알맞은 자리를 찾아 꽂을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다가 헌사에서 멈췄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를 믿는다지요.*

  나는 내가 미련하게 품고 있던 악을 지면 위에 모두 내던지고 떠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내 과오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준 벗, 콜에게 바칩니다. 머피.

  그 책 안에는 이반이 바라는 가설들이 들어 있었다. 글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었지만, 이반은 당장 성흔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반은 귀를 문지르며 방으로 책을 가져와 서랍에 있던 편지묶음을 꺼냈다. 한 장과 필체가 맞았다.

  이반은 일주일을 들여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모할머니의 책을 암기한 뒤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불이 책을 달굴수록 표지는 더욱 단단해지고 불길한 빛이 났다. 장작더미에 물을 들이붓자 책의 열기는 곧바로 쥘 수 있을 정도로 날아갔다. 발로 짓밟아도 구겨지거나 찢어진 자국은 감쪽같이 펴졌다. 저주와 해답의 연결고리와 고난을 동시에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후로 그는 가능한 무엇이든, 사람 말고는 무엇이든 불 속에 집어넣었다.

  지나가 물려받은 목걸이를 망치로 내려쳐도 멀쩡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이반은 다른 가능성을 시행해보기로 했다. 그러기 전 목걸이를 돌려놓으려다 들킨 이반에게 지나는 목걸이가 필요 없다고 했다. 이반은 지나에게 의미 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해보려고 노력했다. 지나는 매번 옛 물건을 뜯어내고 고쳤다. 그렇다고 완성한 물건이 아주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는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처음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건…….”

  지나는 늘 오래 말을 골랐다. 이반은 인내심 없이도 지나를 기다릴 수 있었다. 콜이 지나를 낳았을 때, 이반은 먼발치에서 갓난아이가 묵묵히 산파의 품에 안겨있다가, 한참 뒤 엉덩이를 맞고 나서야 겨우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았다. 주변 사람들도, 콜도─사실 콜은 잘 모르겠다─, 지나가 금세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는 이반과 함께 가장 오래 이곳에 남았다. 그러니 목숨을 재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웠다. 깍지 낀 손을 아래로 내리는 동안, 지나는 한 번 더 의외의 답을 냈다.

  “역시 이런 건 한심한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이반은 단숨에 답했다. 지나를 위로하기 위해 부정한 게 아니었다. 지나에게 앞으로 괜찮을 거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아이였던 어른의 말이 별 목걸이를 손에 든 이반을 깨웠다. 이반은 지나에게 옛 주인님은 지금의 주인님을 사랑하셨다고 말해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진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날 단서를 골라내기 위해 지나를 관측한 결과가 결국 동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속내는 명확했다. 두 사람은 아이인 채로 남겨졌고, 이반은 차라리 지나처럼 생각하고 싶었다. 눈높이만큼이나 닮은 처지에서 이반은 기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그는 여태껏 지나에게 다른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진정으로 한심한 건…….”

  이반은 드물게 지나의 시선을 피하며 보석함을 정리했다. 떨어진 루비를 줍고 얼마나 하인들이 가져가고 잃은 건지 허전한 상자를 잘 닫아 서랍에 집어넣었다. 지나가 입을 다무는 것처럼 이반은 어물거리다가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지나가 무슨 마음으로 남겨질지 이반은 짐작하지 않았다.

 

 


5

 

  당신도 써보세요.

  지나는 이반의 사소한 말로도 걱정하고 불안해졌기 때문에 실제로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했다. 이반은 지나가 궁금했다. 그리고 지나의 글에도 힘이 담겨있다면 훨씬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떠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별 소용은 없었다. 지나의 일기는 지나의 처지만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도 이반은 어쩐지 괜찮았다.

  “왜 이반은 여길 떠나지 않나요?”

  “주인님께서 여기에 계시니까요.”

  지나는 핑계 속에 담긴 의미를 헤아려보며 왜 자신에게 이리도 친절하게 대하냐고 물었다. 이반은 또 아무렇지 않게 지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반도 왜 상냥하고 묵묵한 집사 행세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반이 받아새긴 숙명은 이곳에서 좋은 사람으로 지내는 것이었다. 캄캄한 빗장에 갇힌 탈선 욕구를 풀어내려도 정직하게 흘러갈 관성. 착한 아이로 스스로 포장하지 않아도 이반은 지금과 같은 모습일 터였다.

  이반은 성실하게 자신이 떠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얼버무려 설명했다. 주인님이 여기에 있는 걸 넘어, 자신이 원하는 게 아직 이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나는 그게 무엇인지 물었지만 이반은 어깨만 으쓱했다.

  “이 집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

  “주인님이어야 합니다. 본받을 정도로 외로움을 모르는 분은 주인님밖에 없는 것 같거든요.”

  “외롭진 않았는데요. 꼭 외로워야 하나요…?”

  “글쎄, 오래 홀로 계셨으니까요. 언젠간 그렇게 될지도요.”

  지나가 이반에게 진심으로 답을 구할 때에는 나름의 위안이 되었다. 이반은 가끔 자신을 잃고 난 지나를 상상했다. 그도 이반이 이곳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반은 가끔 지나의 외로움을 깨우쳐주는 식으로 심술을 부리다가, 늘 그렇듯 친절하게 판자를 옮겨주고 못을 내밀었다. 알게 모르게 지나의 초조함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함께 떠납시다.”

  지나가 수첩을 반절 채웠을 즈음 이반은 제안했다. 이반이 무례하게 단언해도 지나는 목 마른 낯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요지는 이반마저 저택을 떠나려고 하는데, 지나를 홀로 두기에는 마음이 쓰인다는 것이다. 이반은 지도를 찾아보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목적지를 여러 곳 정해두었다고 했다. 그런 이반이 금세 짐을 꾸려 훌쩍 떠날 것처럼 말했으므로 지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혼자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이반도 그랬다.

  두 사람의 지붕이 되어주던 저택의 짐은 가방 세 개로 추려졌다. 이반이 하나, 지나가 두 개. 이반이 지나의 것을 하나 거들어 양손에 든다. 창살로 된 문을 밀고 집사가 나서면 주인은 손을 쥐고 따라나선다. 문턱을 넘어 양달을 밟는 순간 지반이 진동한다. 햇볕을 받아 무너지는 창살, 장막이 걷히는 이반의 얼굴. 이반은 비로소 어린아이의 가면을 헐벗고 섰다.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리를 잡아끄는데도 이반은 날개를 단 것만 같았다. 지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폐허가 되고 만 대저택보다, 비로소 장막이 걷혀 늙고 만 이반보다 자신이 더 초라했다. 이반은 원래의 궤도에 오르고 나서도 한결같이 지나를 다독였다. 이제 괜찮을 테다. 우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더이상 외롭지 않아도 된다…….

  “해가 뜨는 곳으로 가요, 지나.”

  진위는 따지지 않았다. 사실 날씨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나는 이마에 차양을 냈고, 이반은 비로소 후련하게 웃었다.

 

 

 


 

* 잠언 14:16

유련
유련

다유 & 목련

초여름 풍선

1

  불청객은 비가 내리는 새벽에 찾아왔다. 다유는 떡갈나무와 은행나무가 섞인 활엽수들 사이로 걸어나와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옷을 털어냈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노력했다. 모자를 벗어 2층 집을 올려다보며, 그는 지저분한 뺨을 훔쳤다. 다유는 옷깃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한 다음에야 문을 두드렸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정도로 배를 곯은 탓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어도 집 주인이 잠귀에 밝다는 행운은 통한다. 윗층에서 커튼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고, 눈두덩이를 때리는 빗줄기에도 굴하지 않고 일부러 미소지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엉겨붙은 먼지가 붙은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에 핏빛 루비 같은 눈이 두 알 박혀 있었다. 주인은 고개를 홱 돌려 커튼을 친다. 무엇에 걸렸는지 물건이 날카롭게 넘어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다유는 섬찟한 마음에 굳었어도, 당돌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다유는 인내심 없이 주위를 맴돌다가 한 번 더 물었다.“미안합니다,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혹시 다치셨나요?”
  꿋꿋이 세 차례를 더 묻자 안에서 새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음, 염치 없지만 정작 제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실례지만, 그러니까. 윽…….”

  발을 딛느라 오래된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가까워져 다유는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기대를 걸었다. 지친 몸을 기둥에 기대고 있으면, 녹슨 경첩이 시끄럽게 흔들리며 문이 열렸다. 주인장이 등불을 들고 딱딱하게 말했다. “무, 무슨 일이신데요?” 햇빛을 쬐면 녹아버릴 것처럼 눈보라를 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달을 떼어 빚은 것처럼 새하얗고 젊었다. 나이에 비해 연식이 있는 숄을 어깨 안으로 끌어당기며 경계하고, 목은 잔뜩 움츠렸다. 다유는 최대한 호감을 사기 위해 차갑게 식은 손으로 흐트러진 안경을 고쳐썼다. 다른 팔은 옆구리를 감쌌다.
  “나는 바다 건너에서 출발해 세상을 떠돌고 있는 방랑자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전 강도를 만나는 바람에 멀쩡한 옷은 한 벌       에, 짐은 죄다 빼앗겼지요. 어제 비마저 내린 탓에……. 지금은 이렇게 되었어요.”
  주인은 빗물과 다른 비린내를 맡았다. 뜨겁고 눅진한 피가 배어나온다. 짐승에 들이받쳤거나 칼에 찔렸을 상처였다. 게다가 이 불청객은 며칠 씻지도 못한 듯 지저분한 생쥐 꼴이었다. 고동색 바지에 헐렁한 셔츠만 입은 영락없는 여행객이었으나 상태는 심했다. 목련은 구질구질한 냄새에도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며 제 팔을 감쌌다. "그래서요?" 사람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 신세를 질 수 있을까요?”
  “그건…….” 
무언의 갈등이 안색 위를 오간다. 다유는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수로든 보답할게요, 눈 붙이고 잘 곳이 없다는 것 말고는 다 할 수 있거든요! 무엇이든……. 사실 서 있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금품이라도 달아두려는 듯 주머니를 뒤적이는 손길이 서툴러 늘어진다. 발바닥에 달라붙은 피로로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린다. 처마 아래에서도 기침을 뱉는 소리는 선명했다. 부상자의 어깨는 초라했고, 여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모른 체 할 만큼 매정하지 못했다.
  “조건이 있어요.”
  다유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든다.
  “눈을 붙이고 나면 말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는 비켜선 자리로 물 자국을 내며 들어섰다.

 

 


2

  목련은 주방에서 다기를 꺼내 쟁반에 받치고, 난롯가에 물을 끓였다. 세월에 무뎌져 잔금이 보이는 주전자가 데워진다. 직접 꺾어 말린 허브를 걷어와 둥근 테이블에 올려놓고 몇 분 우려내면 그만이라, 잘 닦인 잔에 담긴 찻물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안정감이 묻어났다. 목련은 밤이 되기 전 벽난로를 떠나 계단을 오르던 찰나, 다유가 방 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말을 거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게 훨씬 편했기 때문에 목련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더군다나 곧 해가 지기도 했다.
  목련은 나고 자란 곳은 어느 뒷골목의 빈 집으로, 천애고아인 그를 여러 어른이 나누어 키웠다. 그 골목가에는 도심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 좁은 구역을 비집고 살았다. 지주에게 쫓겨난 소작농, 굶주려 빵을 훔치다 수배에 걸린 청년, 하물며 지붕 없이 떠돌다 지쳐 이곳에 정착한 사람도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불길한 아이는 그 골목에 잘 어울렸다. 그들은 은둔한 예언자—목련이 글을 배울 때에는 다들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를 중심으로 조합과 비슷하게 이득을 도모했다. 소외되었던 그들 중 몇몇은 목련처럼 꼭 이상한 마법을 한두 가지씩 부릴 줄 알았다. 앞집의 파비는 직접 씨앗을 묻으면 빠르게 열매를 맺었고, 세희는 깨끗한 물을 솟아나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점을 늘려 돕고 살기로 정했다. 메마른 땅에 물을 붓고, 씨를 심는 것처럼. 서로 신뢰를 주기 위해 숨기지 않기로. 그들은 함께 아이를 키웠고, 목련은 사랑 받고 자랐다. 그래도 목련은 마을과 자신 사이에 담을 쌓고 지냈다. 그는 스스로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창백한 아이가 지닌 마법을 가리켜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위로했다. 지금의 그는 악마의 피로 쓰인 저주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목련은 밤이 되면 사라졌다가 낮이 되면 도로 나타났다. 그것은 신기루에 갇힌 모래바람 같기도, 흉가에 묶인 유령 같기도 했다. 목련은 작물을 자랄 수 없게 하는 천성이 싫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더욱 무서웠다. 그래서 홀로 책을 읽거나 집안일을 돕는 일이 많았지만, 어른들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줘 한 번은 숨바꼭질을 했다.
  목련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다. 주인이 없는 오두막 안, 잘 개킨 옷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장롱 안에서 숨을 참고 있으면, 땀으로 긴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다. 목련은 웅크린 채 시간을 세어보다가 깜빡 졸았고, 아이들의 목소리에 깼다. “해가 다 졌잖아~ 못 찾겠어.” “하는 수 없지. 이 정도면 걔도 갔을 걸.” 목련은 박차듯 뛰어나가 외쳤다. “여기 있어요!” “진짜?! 어디?”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돌아보았고, 조금 뒤에는 눈썹을 찡그렸다. “여기, 여기요…!” 목련은 속도를 내 걸어갔다. 그중 하나가 가까이 걸어왔다. 목련이 가까이 멈춰설 때 소년 중 하나가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바람에 쿵 부딪혔다. 목련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입을 떼려고 했다.
  “방금 여기 있던 거 누구야?”
  “나 안 그랬는데!”

  목련은 어깨를 감싼 채 슬금 발을 뺐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덧 주변이 어두워진 채였다. 목련은 긴장하느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 날 못 봤겠구나. 그런 거야…….”

그는 투명해진 팔뚝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돌아갔다.
  그는 헝겊으로 엮은 주머니에서 바늘을 꺼내더니 손톱 아래를 찔렀다. 따끔한 듯 미간을 찌푸려서, 목련은 화들짝 놀란 만큼 꼿꼿이 굳었다. 그는 손을 뒤집어 보더니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참고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 자리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이젤이 서 있었고, 다유는 그 위에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피는 오차 없이 균일한 선으로 그어졌고, 새까맣게 타버린다.
  그는 저주를 직접 쓰는 사람 같았다.

 

 


3

  다유는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던 그날은 여유가 없는 얼굴을 했으면서도,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에는 선뜻 활기를 찾고 집안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먼지가 쌓인 창고를 쓸고 닦았다. 식사를 자주 거르는 습관을 눈치채고는 나누어 먹을 미트 파이를 구웠다.
  셔츠 절반을 적신 상처는 숙면을 취해도 낫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가만히 있으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처럼 움직였다. 물론 다유는 언제나 태평하게 굴었다. 반듯한 얼굴선과 달리 손은 부르텄고, 그 손이 닿는 곳은 어디든 말끔해졌다. 특히 그는 정원에 나가 있는 일이 많았다. 팔을 걷어붙이고 새순이 난 배나무의 잔가지를 일일이 솎아내고 있었다. 뾰족한 덤불이나 잡초도 모조리 도려냈는지, 정원가위를 든 다유의 옷에는 풀물이 들었다.

  “그, 그냥 두셔도 돼요. 제가 부탁한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아, 약속이요.”
  “네, 네에…….”

  입술을 짓씹는 목련에게 다유가 가위를 내려놓고 다가섰다. 송글송글 흘리는 땀을 소매로 훔치는 건 그였는데, 등골이 쭈뼛 선 건 반대였다. 피를 흘리는 그는 두렵고, 지금을 믿고 싶었다.
  “어긴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름은 묻지 않고, 여섯 시가 지나면 위층으로 올라오지 말고. 일주일이 지나면 떠나기로 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지켜주세요.” 목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유는 더욱 짚이는 것이 없다는 눈치로 턱을 문질렀다.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이건… 아, 설마.” 둥근 눈매에 장난기가 깃든 채 다유가 몸을 돌렸다. “대가로 뭐라도     요구할까 봐?”
  “…….”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유는 낮게 눌러 참던 웃음을 터트리느라 상체를 숙였다. 하하! 목련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두 주먹을 움켜쥔다. 다유는 재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냥 기뻐해주셨으면 해요, 그게 답니다.”
  다유는 그 길로 목련을 이끌고 꽃이 핀 언덕으로 데려가 주었다. 그의 주장으로는 짐승에 들이받힌 뒤 숨을 곳을 찾다가 반려한 장소라는데, 목련은 산들거리며 흔들리는 풀꽃이 반가운 만큼 의구심이 생겼다. 대가 없는 노동이란 없고, 그는 이상했다. 그가 아주 만일 자신에게 호의를 품었다면, 그것은 발 뻗고 잘 곳을 내어준 은혜에 불과할 텐데 과분한 선을 넘나드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목련은 밤마다 조금 갑갑했고, 돌아올 낮이 기다려졌다.

 


4

  “이렇게 들킬 줄이야. 해명하자면, 나는 태생으로부터 도망쳤어요. 태어날 적부터 내 눈은 천리안이 될 수 없지만 그만한 진     리를 담아낼 수는 있었어요. 내가 흘린 피를 물감으로 삼아 화폭에 옮기면, 그 그림은 나 말고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       이 ‘정직한’ 그림이 되던 탓입니다. 펼쳐진 책의 글자도 기억해 옮길 수 있고, 튀어나온 잔머리마저 어긋남 없이 반듯하지요.

   원래 윗형제와 달리 권력에 관심 없고 미천한 바보 행세를 했기에 이 재능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러나 나를 내쫓고

   싶었던 누군가는 여전히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밀문을 목격한 후 내용을 잊지 못했던 나는 멍청한 도련님 이상의 골칫거리가

   되었고, 결국 이 신세가 되었죠.”
  “…….”
  “그렇다고 지금 쫓기는 건 아닙니다. 정말로 사슴 뿔에 들이받힌 거예요! 그런 해프닝만 아니라면 나는 지금이 훨씬 자유롭

   습니다. 허드렛일이 익숙하고, 이름을 묻지 않고 지내는 것도 익숙하죠. 당신을 남겨가려고 그림을 그리던 것도 아닙니다.

   내가 떠나고 나면 당신은 나를 잊을 테니까. 그래요, 마지막 날에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직접 태워주세요.

   그림은 내가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너는 것과 비슷한 보답입니다.”
  “……마지막 날, 기억할 거예요.”
  “아가씨. 손가락을 걸까요?”
  “아, 손이 더러운데… 사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복잡해서요.”
  “괜찮아요. 이제는 무섭지 않은 거죠?”
  “네, 조금은. 지금은 다른 쪽으로… 혼란스러워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자, 말씀하신 열매는 다 땄어요. 돌아갈 채비를 할까요.”
  “그렇게 해요.”

  다유가 천을 댄 바구니에 베리나 딱딱한 열매, 씨 같은 것들을 쏟아부었다. 그가 싱긋 웃자 목련은 더듬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두렵진 않나요?”
  “제가요?”
  “왜, 저희는 모르는 사이고. 도망치신 데다가 여태껏 숨기셨다고도 하셨잖아요.”
  “오해를 쌓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실 오해하셔도 괜찮지만, 그건 당신이 불안한 일이니까요.”

다유 - 해나

[유련_목련_사랑해].png

목련 - 사랑해

 

 

5

 “눈을 감아주세요.”

  목련은 회중시계를 꺼내 남은 시간을 가늠해보고, 흰 손등을 위로 가게 내밀어 조용히 굳은살이 배긴 손 위에 겹쳤다. 다유는 그가 작지 않은 용기를 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도 그런 게, 홀로 살던 여자는 스스로 미다스의 불행을 짊어졌다고 생각했다. 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는 기적. 미다스는 희생으로 부와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목련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저 두려움을 설파하는 저주로는 그보다 못했다. 다유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서늘한 얼굴을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니 모른 척 하는 것은 종의 몫이다. 다유는 문턱에서부터 이젤 앞까지 인도하며 사제처럼 걸었다. 그는 관습과 체제에서 벗어난 이방인의 행세를 했지만, 목련의 경계를 완전히 부수기에는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집사의 자질은 부족할 데 없었다. 다만 그는 하인이 되기에는 잘 먹고 자란 태가 났고, 늘 평탄한 강 건너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목련의 견식은 이름 모를 숲에 한정되어 있는데도. 목련은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다유가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도 했다. 코끝이 간지러웠다. 눈을 꾹 감아 잘 보이지 않아도, 햇빛이 살갗에 달라붙는 감각으로는 야외였다.

  “프리지아 향이 나네요.”

  “우리가 같이 돌봤잖아요. 만개할 시기가 되었더군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진작 시들 줄 알았어요.”

  “빈말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몫이에요. 나는 종이고, 신은 거짓을 고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립니다.”

  “그럴까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목련이 고개를 저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향한 거짓을 참지 못하고 감정적이더군요.”

  “불경하시네요……. 거짓말도, 아니에요.”

  “물론 믿고 있어요. 그 신이 당신을 저주한다면 곧장 내 스스로 혀를 자를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말씀을.” 부정을 탄 벌은 이미 조용히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 그것을 모르는지, 혹은 알고도 모른 척 하는지 단정한 그가 하는 농담은 때로 위험천만했다. “진담이에요. 정 신경 쓰인다면 직접 칼을 들어주세요.”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과감한 부랑자의 행세를 했지만, 걷는 폼새나 포크를 드는 습관에서 티 없이 맑은 도련님의 태가 났다. 그럴 때마다 목련은 그의 외면에서 안전하고 미약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점차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햇빛이 내리쬐어, 뻣뻣하게 굳었던 팔에 힘이 빠지고 웃음이 났다. 다유는 낡은 의자를 끌고 와 긴 곱슬머리를 등받이 뒤로 넘겨주고 앉혔다. 말씨와 달리 안주인을 떠받드는 행동은 살뜰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조금 더요.” 그는 더 캐묻지 않고 데이지를 닮아 엷은 천을 잘 펴서 다리에 덮어주었다. 목련은 슬슬 손바닥 위에 놓여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호의를 받아들였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태도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목련은 다유가 팔을 움직이는 대로 실을 매단 관절 인형처럼 두 손을 내렸다. 그는 그새 자신의 흙먼지가 옮겨 붙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냘픈 어깨를 털어준 다음에야 물러났다. 목련이 마침내 눈꺼풀을 들어올려 정면을 바라보면, 정원 한가운데 흰 천이 덮인 이젤이 놓여 있었다. “헉.” 목련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끝을 바늘로 찔러가며 백지 위를 휘젓는 일련의 행동, 다유가 벌였던 기행의 정체를 끝까지 들추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이 한 차례 봄의 들꽃들을 휩쓸고 지나가자 그는 더 미루지 않고 천을 걷어냈다.

  에칭으로 떠낸 것처럼 섬세하게 그려진 나무 한 그루였다. 삼십 년 된 것 같은 나무 위로는 둥글게 부풀어가는 꽃이 개화를 기다리며 웅크린다. 몇 개는 앞서 피어 아래로 풍성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검은 줄기는 까칠하지 않고 매끄러운 나뭇결이 세밀해 그려냈다기보다는 찰나를 포착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목련은 그 나무를 가리키며 목련의 숨이 멎을 것 같아 다유는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아주었다. 상처를 감추려 얇은 천을 감싼 손가락마저 따뜻해, 목련은 슬그머니 피했다. 공포와 안도가 교차했다.

  “알고 계셨어요?”

  “당신도 태양을 등지고 북을 바라보잖아요.” 그는 그 나무와 목련이 닮았다는 사실조차 장황하게 말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바람 때문인지 눈이 버석버석 말랐다. “미안해요. 울지 말아요.”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세요?”

  “마땅히 받아야 할 값이니까.”

  대화가 이어지는 대신 가느다란 팔이 남자의 목을 끌어안는다. 주인이 옷깃에 얼굴을 묻는 그대로 그는 굳어버렸다. 다유는 머뭇거리다 제 팔을 둘러 목련의 어깨를 안았다. 그의 주인이 말한다. “저는 누가 아픈 그림은 싫어요. 다른 답이 듣고 싶어요…….”

  “당신의 울타리에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리는 내내 내 마음이 나아졌어요. 진심으로요.”

  그 순간 목련은 비로소 다유의 숨으로 살아났다. 가슴 한 구석의 박동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건 팔을 풀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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